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다윈 (문단 편집) === 유년기 === [[잉글랜드]] 슈루즈베리(Shrewsbury)에서 [[의사]]인 로버트 워링 다윈의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은 유명한 [[의사]]였다. 물론 현대적인 의미의 의술을 행했던 것은 아니었고, 주로 약물과 심리치료를 통한 몸의 안정을 통해 병증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는 의사로서의 실력을 크게 인정받았었는데, 그 능력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당시 영국의 국왕 [[조지 3세]]는 이래즈머스 다윈에게 주치의가 되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했다. 이래즈머스 다윈은 토리당을 매우 싫어했는데, 당연히 국왕의 주치의가 되면 그들과 엮이고 한패가 되는 것이라 여겨 거절했다고 한다. 거의 반드시 귀족의 작위를 수여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며, 손자인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비슷한 주장[* 1794년 동물학(Zoonomia)이라는 책을 썼는데 "모든 온혈 동물은 자신의 일부를 변형하는 힘을 갖고 있고, 이렇게 개량된 형질은 자손에게 이어진다"라고 기록하였다. 그의 이런 사상은 찰스 다윈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아이디어에 대해 책 한 권까지 썼다면 깊이 파고든 셈이고, 다만 손자만큼 전문적으로 파고들지 못했을 뿐이다.]을 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종교적으로 사람의 [[신분]]을 가르는 짓은 어리석다면서 기독교 주류를 비난하다가 파문당했으나 당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까지 이름을 남긴 저명한 학자들과도 교류할 정도로 존경과 인정을 많이 받았던 터라 별다른 불편을 겪지 않았고 그걸 자랑하며 당당하게 지냈다.[* 어차피 이 시기는 중세도 아니고 교회에서 파문당한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일 따위는 없었던, 종교의 힘이 엄청나게 줄어든 시기였다. 그래서 이래즈머스 다윈은 [[성공회]] 측으로부터 파문을 당했음에도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뒷날 그의 손자인 찰스 다윈도 [[진화론]]과 관련된 이유로 종교계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오히려 승승장구 했고, 되려 그와 대립하게 된 인물이자 [[개소리|진화론이 종교의 가르침에 반한다고 주장한]] 윌버포스 주교가 입에 게거품을 물면서 [[창조설|창조론]]을 설파했다가 세간으로부터 [[꼰대|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라고 비웃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의 혁신적인 주장들은 당대에 묻혀졌고, 손자의 엄청난 유명세 때문에 오히려 불이익(?)을 받기도 했지만, 이러한 사상이 집안의 밑거름이 되어 손자 찰스 다윈이 그런 이론을 펼칠 수 있었던 만큼 지금은 상당히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이다. 이래즈머스 다윈은 자신의 아들들도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찰스 다윈의 아버지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런 아버지의 바람대로 훌륭한 의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성공보다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래즈머스와 달리 로버트는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였다. 슈루즈베리는 잉글랜드 슈롭셔 주의 주도인데, 당시 찰스 다윈의 아버지는 슈루즈베리의 3/4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그는 대부업이나 부동산업 등을 통해 재산을 크게 키웠으며, 그의 집인 '더 마운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의학적인 상담을 받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금전적인 거래나 기타 상담을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로버트 다윈은 고집이 있지만 온화한 아버지상의 인물이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아이들이 움직여주기를 바랐지만, 강요하거나 험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는 저녁이면 찰스 다윈과 함께 마차를 타고 산책하며 세상의 여러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끊기면 찰스 다윈은 자신이 관찰한 새의 이야기들로 남은 부분을 채웠다. 찰스 다윈의 어머니인, 수재나 다윈도 상당한 상류층 가문 출신으로 [[도자기]]로 유명한 웨지우드 가문의 사람이었다. 두 가문은 학문적, 사상적, 경제적 교류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찰스 다윈과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매우 깊은 관계가 아니었다. 당시 다윈의 육아를 맡은 것은 그의 누나들, 형이었고 그가 부모님과 만나는 시간은 기껏해야 저녁 후 1시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다윈이 어머니와 사별한 것은 7살 때였기 때문에 그가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실제로 다윈은 후에 그의 어머니에 대해 가진 기억이 거의 없다고 회고하였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어머니가 죽던 날 자신과 누나가 매우 크게 울고 있었고, 하루 종일 그랬었다고.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후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로버트 워링 다윈은 슈루즈베리의 한구석에 '더 마운틴'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뒤편에는 작은 개천이 둘러 흐르고, 집을 조금만 벗어나면 숲이 있었다. 찰스 다윈은 이 개천과 숲에서 여러 생물을 관찰하거나 채집하였다. 그의 집에는 작은 다용도실도 있었는데, 찰스의 형인 이래즈머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와 함께 화학 실험을 하며 박물학에 기초적인 관심을 가졌다. 다용도실의 반대편에는 작은 온실이 딸려 있었다. 이것은 아버지의 취미였는데, 다양한 식물을 기르고 상세히 기록하는 것을 꾸준히 하였다. 자연스럽게 아들 찰스 다윈도 아버지의 취미를 따라했으며 지금까지 전해지는 다윈의 노트에도 어린 시절 당시의 날씨나 식물의 길이, 모양 등을 기록한 내용들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윈의 이러한 취미들은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 이어졌으며, 훗날 '종의 기원'을 출간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다윈이 어진 성품과 생물학 분야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며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